여색을 너무 밝히면
여색을 심하게 밝히는 왕들은
장수하지 못했으며 국사를 돌볼지 않고
여색을 탐한 나머지 침략을 당하거나 왕의
자리를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역사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결론적으로 적당한 성생활과
여자관계는 활력소가 되지만 뭐든 지나치면
해가 된다는 옛말이 옳다는 것을 입증이라도
해주듯 여색을 밝힌 왕들의 결말은 항상
비극적이었다.
여기 여색을 너무나 밝힌
고려의 우왕에 대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10살에 왕위에 올라 5년 동안 할머니인 태후의 눈치만
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우왕은 해방감에 젖어 국상이
끝나자마자 나라일은 신하들에게 맡기고 궐 밖으로
사냥을 나갔다 한다.
무더운 여름 날 깊은 산속에서
‘풍덩’하는 물소리가 들려 사냥감인가하고
계곡을 따라 올라가보니 젊은 여자가 혼자
목욕을 하고 있었다.
우왕이 그녀에게 다가가자
여인은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물속으로 몸을 숨겼다. “나오너라! 나는 이
나라의 임금 이니라!” 여인이 수줍게 일어섰는데
물기가 촉촉이 젖은 여성의 몸을 보고 감탄을 한 우왕은
“다들 잠시 물러가 있거라.” 하고 풀숲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그녀를 탐한 우왕은
이 여인과의 관계에 너무나
만족하였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소녀는 관기이옵니다.”
“뭐라! 기생이란 말이냐? 허허허 어쩐지...
네가 나를 이토록 즐겁게 해
주었으니 내가 너를 데리고 궁으로 갈 것이다.”
“마마,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그녀는 우왕의 승은을 입고
한순간에 기생에서 옹주로 신분상승을 하였다 한다.
그녀가 바로 명순 옹주이다.
그 뿐만 아니라 우왕의 여성
편력은 날이 갈수록 점점 심해져서
궁녀는 물론 민가에서 미모가 뛰어난 여인이
있으면 혼례를 앞둔 여인이라 할지라도 강제로
입궁시켜 자신의 여인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러던 중 최영장군의 딸이
미색이란 것을 알고 최영장군에게 딸을
왕비로 삼을 것을 청하였지만 최영장군은 우왕의
기질을 익히 아는지라 딸은 국모 될 자격이
없다면서 거절을 했다.
우왕이 끈질기게 최영을 괴롭히면서
줄다리기를 하던 중, 갑작스럽게 최영의
집에 행차를 해서 딸의 미색을 보고는 흠뻑
빠져들게 되었다.
“내 오늘은 장군의 딸이
따라주는 술 한 잔 받고 싶소.”
어쩔 수 없이 딸에게 우왕의 술시중을
들게 하였다. 급기야 최영에게 부원군이라
지칭하기에 이르자.
최영장군의 묵인아래
딸과 하루 밤을 보내고 그 후 영비에
봉해졌다. 하지만 우왕은 그 후에도 수도 없이
여색을 탐해 영비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최영은 너무나 딸을 사랑한 나머지
우왕에게 충성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딸이
왕비가 된지 3개월 만에 최영은 이성계와의 전투에서
사망했고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하고
영비 최씨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를 시켰다 한다.
다음해에 강릉으로 유배지를 옮긴 우왕은
그 해 12월에 살해되었다. 일생을 호색한으로 지내던
우왕의 임종을 끝까지 지켜보며 지극히 우왕을 사랑한
여인은 영비 최씨였다. 영비는 우왕의 주검을 슬퍼하며
10일을 아무것도 먹지 않고 곡만 하다 밤이면
우왕의 시체를 안고 잤다고 한다.
이렇듯 호색한들에겐 일반적인
공통점이 있는데, 진심으로 그를 사랑한 여자가
있었다는 것이다. 호색한들은 상대방이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할 때 그걸 깨닫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사랑이
떠나버린 후에야 비로소 후회를 한다.
우리네 보통의 남성들도
마찬가지 인 것 같다. 항상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곁에 있는 사랑을
보다 소중히 여겨야 하며,이에 소홀하여 어리석은
후회를 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주말 짝꿍이랑 행복 하세요~~
雪
野